NTODAY ARTICLE, 2015.07.03
Originally posted here (archived)
[단독 인터뷰] 세모자 “성노예로 살아”vs 목사 아빠 “거짓 주장”
두 아들 “10년간 아버지 성폭행·성매매에 시달려”
아내 “남편, 내게 약 먹이고 윤락 강요… 20년간 맞고 살아”
목사 남편 “재산 노린 허위 사실…고소할 것”
검찰 수사 중… 누리꾼들 진실 규명 촉구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최근 한 교회의 A목사가 자기 아들과 아내를 성폭행했다는 일명 ‘세모자 성폭행’ 사건으로 여론이 떠들썩하다. 더불어 이번 사건의 진실 여부도 뜨겁게 쟁점이 되고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경, 세모자는 ‘A목사 부자 성범죄 의혹 철저 수사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이들은 A목사의 엽기적이면서도 잔혹한 성폭행 등을 폭로했다. 더불어 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호소하기도 했다. 반면 경찰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혐의’ 송치했다.
하지만 세모자는 “우리의 피해와 주장은 사실”이라며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등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또 세모자는 최근 동영상 사이트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채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했고 영어로 피해 내용을 진술한 영상도 촬영해 미국 CNN 방송에도 제보했다. 비난 여론과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검찰은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현재 이씨는 남편인 A목사로부터 결혼생활 20년간 지속해서 약물투여, 윤락행위 강요, 폭행과 협박 등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아들 역시 A목사에게 집단 성폭행을 비롯해 약물투여, 폭행 등을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세모자 성폭행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자 지난 2일, 한 카페에서 A목사의 아내 이모씨(44)와 허모(18)군, 허모(14)군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초 이씨를 단독으로 만나려고 했으나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나와 인터뷰에 임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아이들은 자신의 피해를 일관되게 호소했으며 참담했던 과거 피해를 쏟아냈다. 이씨 역시 힘겨운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세모자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A목사의 온갖 행각을 폭로했다. 그중 차마 기사에 담아낼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A목사의 입장은 이들과 달랐다. 이혼소송에서 유리하기 위해 이씨가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다며 반박하고 있다. 한편, <본지>는 A목사의 아버지가 소속된 교회 측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입장을 들을 수 없었다.
과연 A목사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모자와 A목사의 인터뷰를 통해 본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
- 처음 남편을 만났던 때를 회상한다면.
이씨: 1989 년 겨울 무렵,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 강동구 G동에 이사하면서 친구의 권유로 S교회를 나가게 됐다. 종교가 없었던 나는 친구를 따라 주일마다 그 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에는 남편의 아버지인 B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러던 중 1991년, B목사의 ‘여신도 간음사건’이 터졌는데 남편도 그 사건에 연루돼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남편은 해당 사건을 고소한 상대방 측의 집 근처에 숨어있다가 폭행해 구치소에서 6개월간 살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그는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났다.
남 편과의 교제는 1992년경에 시작됐다. 당시 남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어느 날 그는 나와 친구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식사 후 친구는 먼저 집에 들어갔고 나는 그의 차에 있었는데 차 안에서 그런 일(성폭행)이 있었다.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이 공교롭게 임신이 됐다. 당시 22살이었던 나는 남자친구도 없었고 세상에 대해 잘 몰랐다. 나는 저녁 9시 이후에 집 밖을 나가본 적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것에 너무 놀란 나는 미국에 있던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자신의 셋째 누나를 찾아가라고 했고 셋째 누나를 만나 낙태를 하게 됐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를 만났는데 이후 또 한 번 임신을 했지만 계류유산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성폭행, 낙태, 계류유산에 대해 친정 식구들은 모르는 상태였다. 식구들에게 도저히 말을 못하겠더라. 어쨌든 나는 이미 한번 몸을 버렸다고 생각해 온갖 걱정을 했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처녀가 아닌 것’이 들통 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나는 ‘순결을 잃었으니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계속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 결혼 전,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씨: 남편은 고등학생 때부터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아예 술집을 차려서 보도방을 했다. 약을 타서 강간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살았다. 결혼한 후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 그와 결혼하게 된 과정은 어땠나.
이씨: 그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와 잠시 머물 때 만나거나 전화를 주고받았다. 물론 자기를 믿으라고 얘기했다. 그런 게 없었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5년 8월, 나는 그와 약혼식을 했고 그해 12월에 결혼했다. 나는 그에게서 프러포즈 한번 안 받아봤다. 처음에 친정에서는 남편이 ‘목사’라서 싫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데 그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보고 나니까 친정 식구들의 마음이 바뀌었다. 일단 교회 성도가 많았고 교회가 마치 왕궁처럼 잘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식구들은 ‘네가 이 교회의 사모로 들어가면 우리에게도 뭐가 떨어지지 않겠느냐’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 런 이유로 나는 약혼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약혼하고 결혼하기 전, 그 과정에서 (친정식구와 남편이) 단체로 성관계를 맺기도 했다. 친정엄마와 언니는 돈도 좋아하고 (성)관계를 밝혔기 때문에 그들은 남편을 자신들의 ‘새로운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친정식구들은 남편이 집에 오면 잘 대해줬다.
이 러한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지만 남편은 내게 ‘알겠다,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리고 1996년 1월, 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자마자 그는 나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구타와 성폭행은 결혼생활 20년간 이어졌다. 아울러 윤락도 시작됐다. (성관계를 하기) 싫다고 하면 맞았다. 그는 말을 참 잘했다. 쇼도 잘하고, 울고불고도 잘했다. 그는 ‘어차피 너는 내 아내고 정말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나에게 윤락을 요구했다.
-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의 결혼생활은 어땠나.
이씨: 그 는 미국에서도 나를 내세워 남자들과 성관계를 시켰다. 그는 차를 1년에 한 번씩 바꿨는데 매번 현금으로 고급 차를 샀다. 아버지한테 1~2억씩 받았고 윤락을 하면서 버는 것도 있었다. 계좌를 통해서는 돈을 받는 게 한계가 있으니 사람을 통해 돈을 받곤 했다.
나 중에는 캠핑카도 구매했다. 이유는 그곳에서 나를 윤락시키기 위해서였다. 야영장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캠핑카로 데려와 성관계를 하게 했다. 미국 전국 일주를 하다시피해서 윤락을 한 적도 있다. 성관계는 나만 시킬 때도 있었고 남편 자신이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를 더 많이 시켰다. 그는 당시 나에게 최음제를 먹여서 성욕이 생기게끔 했다. 그걸 먹으면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도 모른다. 기억은 나는데 당시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 그럼 한국에는 언제 돌아온 것인가.
이씨: 나와 남편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 살았다. 2006년쯤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 남편의 가혹 행위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이씨: 남편은 아이들이 5살 때부터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 자위 등) 그 짓을 시켰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약을 먹지 않고 아이들을 성희롱·성폭행했다.
둘째 아들(이하 둘째): 우리는 맞는 게 무서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그때 내 몸무게는 29kg이었다. 당시 나는 많이 말랐을 때였는데 발로 가슴을 맞기도 했다.
이씨: 남편은 아이들을 쫄쫄 굶긴 다음에 “손님 오니까 잘해라”라며 먹을 것을 줬다. 그러면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엄청나게 맛있게 먹었다. 아이들에게 갈증을 느끼게 한 다음 사이다를 딱 하나 사주기도 했다.
둘째: 아 빠는 음식을 갖고 조건을 내걸었다. 또 아빠는 우리에게 “오늘 누구 오니까 잘해라”라고 하면서 자위 방법, 성관계 방법 등을 가르쳤다. 5살 때부터 친구들이랑 선생님이 있었는데 (집에서 배운 대로)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 그때는 그게 부끄러운 것인 줄 몰랐다. 아빠는 항상 “아무 곳에서나 (성기를) 내놓고 이렇게(자위) 해”라고 말하곤 했다.
- 남편이 다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두고 ‘집단 성관계’를 시켰다고 하던데.
이씨: 한번 (마약과 성관계에) 중독이 되면 (이 그룹에서) 나가라고 해도 못 나간다. 이미 그 쾌락의 끝을 알고 중독됐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된 섹스촌이 전국에 퍼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첫째 아들(이하 첫째): 그 사람(아빠)은 우리를 팔았다. 아빠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성폭행하게 했다. 성폭행이 다 끝나면 그 사람들은 아빠한테 돈을 줬다.
둘째: 아 빠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이 성관계를 해야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다 같이 성관계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약 기운이 빠져나간 뒤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했다. 이후 아빠는 사람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며 “네가 우리 아이들을 (성폭행)했다”라고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받아서 해결하든지 입막음을 시켰다.
- 아이들에게 어떤 행위까지 시켰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이씨: 그 는 “하나님이 주신 몸이니까 써먹어야 한다. 섹스를 안 하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벗고 있었는데 옷으로 가려서 쫓겨난 것이다. 벗고 살아야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도둑질도 시켰다. 나는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움을 느꼈다. 남편이 위장이혼을 하자고 했기에 신고를 했지, 아니었으면 그냥 아이들하고 죽었을 것이다. 물론, 도망칠 궁리는 했었다. 이 소굴에서 나가야 한다고 늘 생각은 했다. 그런데 친정도 다 한 패였다. 친언니와 엄마는 남편에게 “쟤를 좀 때려. 저러다가 마음 변해”라고 말하곤 했다.
- A씨로부터 24시간 동안 감시도 당했다고 하던데.
첫째: 그렇다. 우리는 24시간 하루 종일 감시를 당했다.
이씨: 남편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지만 불안한 나머지 아이들한테 엄마가 뭐 하는지 감시하라고 하며 외출하곤 했다.
둘째: 우 리는 학교에 다녔지만 자유가 없었다. 아빠는 우리를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고 수업이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게 했다. 우리는 걸으면 안 되고 뛰어가야 했다. 나는 학교에 가면 늘 잠을 잤다. 우리 형도 학교에 가면 항상 멍해있거나 잠을 잤다. 집에 가면 항상 (성폭력 등에) 시달리고 약을 먹었으니까.
이씨: 아이들 학교에서도 집에 계속 전화를 했다. 학교에서는 아이가 이상하다면서 심리치료를 받게 했고 첫째 아이는 2010년부터 정신과에 다녔다. 거기에 대한 진단서도 있다.
-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자유가 없었나.
둘째: 갖 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아빠의 마음대로였다. 우리는 친구 집도 못 갔다. 우리 인생인데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자신의 마음대로 우리를 사용했다. 우리는 노예였고 장난감이었다. 아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나는 사실 아빠의 후계자였다. 엄마를 감시하라고 하면 감시했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를 때리고 소리 질렀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 세 사람 모두 잦은 성폭행으로 몸과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첫째: 아빠는 우리에게 (성폭행이 끝나고 나면) “오늘 진짜 잘했다. 다음에는 더 잘해”라고 말했다. 아파도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병원에 가면 아빠의 범행이 들키니까 못 가게 했다.
둘째: 우리한테는 지옥이었지만 자기(아빠)한테는 천국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우리를 가족보다 ‘돈’이라고 생각했다.
이씨: 아 이들이 어릴 때부터 약에 중독이 돼서 지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예민하고 성적인 것을 밝히니까 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게 됐었다. 당시 나와 아이들은 사리 분별을 못 했다. 집에서도 성폭행에 노출돼 살았기에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러고 산 줄 알았다. 우리 큰아이의 경우는 아빠한테 당했던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현재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고 있다. 아이들이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웠어야 하는데 강요해서 끌고 다녔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의 몸이 반응하곤 했다.
나 역시 20년간 수면제 등을 먹으며 살아서 지금도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지금은 거의 제정신으로 산다. 예전에는 글 쓰는 것조차 몰랐다. 기본적인 생활도 못했고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그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아이들 역시 옳고 그름을 알고 세상을 배우고 자유도 알고 접하고 우리가 잘못 살았다는 걸 알았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먼저 아빠와 싸우자고 말했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 두 아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쓴다. 영어는 어떤 계기로 배우게 됐나.
첫째: 아빠는 자신의 (윤락) 사업을 잘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둘째: 또 아빠는 우리가 한국 사람과 소통이 안 되게 하려고 한국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만약 한국말을 하면 사람들이랑 대화하면서 아빠한테 성폭행 당했다고 말할까봐.
이씨: 반대로 남편은 나에게 영어를 안 가르쳐줬다. 그리고 혹시 나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꾸밀까봐 30분도 같이 못 있게 했다. 그는 항상 우리를 자기 옆에 앉게 하고 주시했기 때문에 우리 세모자는 붙어있을 수 없었다.
- 남편이 위장이혼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씨: 지 난해 남편은 나에게 위장이혼을 하자고 했으며 성폭행에 가담한 10명을 고소하라고 시켰다. 그러면 자신이 뒤에서 (그들에게) 돈을 뜯겠다는 것이다. 또 마지막에 일이 잘 안 되면 자신을 고소하라고 했다. 근데 내가 자꾸 도망을 다니니까 남편이 화가 났다. 우리가 원룸에 숨어있었는데 그는 나와 아이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도 오고, 아이들만 있을 때에도 왔다. 그리고는 CCTV를 설치해놓고 나갔다. 이후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억지로 성관계를 시켰고 그걸 찍어서 사람들한테는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성폭행을 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 동영상으로 CD를 만들어 사람들한테 팔았다. ‘이씨는 나쁜 사람이다. 믿지 마라’고 했다. (이혼을 하고서도) 다른 집에 가서 남자들이나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관계를 맺게 했다. 집을 빌린 다음에 그곳에서 성관계를 시킨 뒤, 그는 우리에게 집을 제공한 사람한테 뒤집어씌우라고 내게 말했다.
- 그 후 생활은 어땠나.
이씨: 아 이들을 필리핀에 보낸 뒤 나는 더욱 끌려다녔다. 원래 남편을 신고할 마음은 없었다. 아이들이 몇백 명한테 (성폭행에) 놀아나느니 공부시키고 필리핀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이들을 필리핀에 보낸 것인데 나중에는 뭐만 있으면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협박했다.
-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을 당시, 돈이 없었을 텐데 금전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나.
이씨: 집에서 나오자마자 정부에 범죄피해자센터를 통해 긴급자원을 신청했고 그 돈으로 3개월간 생활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생활하고 있고 식당 같은 곳에서 일용직 일을 하며 지낸다. 우리는 겁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20년간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산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사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아이들이 나를 살렸다. 아이들만 살리면 나는 죽어도 상관이 없다.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는 저기 높은 사람들, 무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를 내리고 댓글을 내리는 건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혼자 싸우고 있으며 어떤 단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있다.
남 편이 정말 결백을 주장한다면 삼자대면하자고 말하고 싶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 만나자는 것이다. 나를 미친 여자라고 취급할까봐 2007년에 아이들을 데리고 몰래 나가서 정신감정 받은 것도 있다. 또 해바라기센터를 통해 심리 상담을 받은 것도 있다. 첫째 아이의 C대학병원 정신과 진단 소견서를 보면 ‘상기 환자는 어린 시절부터 장기간 지속된 child sexual trauma(아동의 성적인 정신적 외상)를 주소로 내원하신 분으로 입원 후에도 악몽, 회피, 간헐적인 분노 표출, 신변 안전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과 강박 등의 증상이 중증도 이상으로 지속돼 약물치료 및 면담치료를 진행했다’고 나와있다. 이것은 내가 꾸민 게 절대 아니라 정식으로 받은 것이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한번 데리고 나간 다음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며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매일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나가니까 당연히 좋았다.
- 남편 외에 다른 사람들도 고소했다고 하던데.
이씨: 한 두 사람은 생각도 안 난다. 꾸준하게 7년에서 10년가량 우리와 관계 맺은 사람들, 주로 10년 넘은 사람들을 고소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자식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우리 세모자를 자신의 장사 ‘밑천’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세계에서는 이것(몸을 대주는 사람)을 ‘모델’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사람들에게 “모델을 사서 (윤락을) 하면 모델료를 줘야 하지 않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우리를 때리고 세뇌시키고 성폭행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했다.
- 현재 피의자들은 세모자의 주장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이씨: 현재 우리와 성관계를 한 피의자들은 우리를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 쪽에서는 아예 부인하고 있다.
둘째: 경 찰이 나와 형에게 어떤 사람들의 사진을 10장 정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형이랑 내가 그중에서 우리에게 성폭행했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후 우리를 성폭행했던 한 여자와 대질심문을 하는데 그 여자가 막 비웃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형이 화가 나서 뭐라고 했더니 여자는 “대질을 못하겠다”며 그냥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우리는 그 여자의 가슴에 뭐가 있고 하지정맥이 있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 이번에 경찰이 재조사에 착수했는데.
둘째: 우 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가 자유를 가지려면 이 사건이 끝나야 한다. 이 사건이 끝나려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경찰은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을 피해자로 생각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리고 나는 어리기 때문에 해바라기센터라는 곳에서 조사를 받았어야 했지만 우리는 성폭력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어두운 방,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조사에 임했다. 내가 10년 동안 성폭행을 당하고 협박을 당했는데, 그걸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 않나. 그런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형사는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했다. 어린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 같아 겁을 먹었다.
이씨: 엄마인 나는 아이가 조사받을 때 들어가지 못 했다. 또 아이가 어떻게 조사받았는지 조사 당시의 동영상 테이프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경찰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 수사과정에서 성행위 관련 동영상이 발견됐다는데.
둘째: 경 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들었다. 그 영상은 아빠와 나, 형의 친구 이렇게 다 같이 학교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비디오 자체를 보여줬는데 빨간 글씨로 뭐가 쓰여있어서 보려고 하니 형사는 “이름은 보지말라”고 했다.
이씨: 결 국 경찰에서는 이 사건을 무혐의 처리해 종결시켰다. 이후 경기지방경찰청에서도 무혐의가 됐는데 이는 당시 친정 식구들이 증인으로 들어가 “(이씨가) 정신병이 있다”고 해서 무혐의 처리가 된 것이다. 내가 고소한 사건은 검찰로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 지난해 11월경, ‘A씨 부자 성범죄 의혹 철저 수사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연 적이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열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씨: 경찰이 압수수색을 했는데 마약이 없다고 했다. 그때 비디오를 바로 찾아야 했는데 거의 한 달 반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 남편의 잔혹한 성범죄를 세상에 밝히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다면.
이씨: 원 래 우리는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충격을 주기 싫어서 안 한 건데,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이 사건을 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가면 평생을 끌려다녀야 한다. 아이들이 이런 아빠를 만나면 뭘 하겠나. 나는 아이들이 변하고 망가지는 게 보기가 싫었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더는 아빠한테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다 폭로하자고 얘기한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들한테 자유를 달라”, “아빠한테 가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아 빠한테 당한 게 너무 심했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죽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다. 엄마랑 동생한테 많이 미안하다. 내가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그때는 내가 힘이 없었다. 엄마가 성폭행 당하는 것을 보면서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해) 나 자신한테 실망했고 화가 많이 났다.
이씨: 이 사건이 낱낱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우리 셋만 피해를 본 건 아니다. 하물며 경찰의 자녀라고 안 당한다는 법 없다. 눈앞에 와있을 때는 그것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빨리 밝혀서 제발 이런 범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씨가 ‘돈 때문에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 죽이기’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는데 이에 대한 입장이 듣고 싶다.
이씨: 기 자님 말씀대로 누군가는 내가 ‘교회 돈을 바라고 집을 나온 게 아니냐’고 한다. 내가 정말 돈을 바라고 이러는 것이라면 이렇게 힘들게 안 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편의 아버지인 B목사에게 가서 바로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겠나. ‘기독교’를 죽이려는 의도도 절대 아니다. 나는 기독교의 ‘정통교회’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몸뚱어리 하나로 집을 나왔지만 돈이 궁한 게 절대 아니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들의 ‘자유’다.
-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씨: 우리는 그냥 밥 먹고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살길 바란다.
첫째: 아 빠, 할아버지, 우리를 성폭행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느꼈던 고통을 두 배, 열 배는 더 느꼈으면 한다.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는 할아버지랑 아빠한테 맞으면서 살았다. 그에 대한 죗값을 받길 바란다. 앞으로 나는 친구들도 사귀고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다.
둘째: 무엇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자유를 갖고 싶다. 우리를 성폭행했던 사람들이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아빠랑 안 닮았으면 좋겠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나쁜 것만 가르쳐줬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습관이 되면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한 적이 있다. 나에게 나쁜 것이 남아있다면 빨리 고치고 싶고 착한 아이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공부 열심히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내 가족이 생겨서 내가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꼭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생기고 이 사건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빨리 자유를 얻었으면 좋겠다.
[A목사 인터뷰] <본지>는 3일, A목사와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세모자 성폭행‧가혹 행위 논란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아래는 A 목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씨가 본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결혼했고 지금까지 성폭행, 구타, 약물 투여 등을 당했다는데 사실인가.
: 경찰 조사에서 이와 관련해 다 무혐의 처리가 됐다. 이씨가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돈 때문에 시작된 사건이다. 2014년 4월쯤, 등기부 등본을 떼어본 뒤 이씨가 돈을 편취한 것을 알게 됐다. 그 이후부터 돈 얘기가 나왔고 내가 2심에 변호사를 선임해서 재산분할 들어가니까 이후 이씨가 성폭행, 성추행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 지난 1991년, 본인의 아버지가 여신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을 당시 본인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
: 아니다. 그건 무혐의가 나온 사안이다.
- 당시 이씨와 결혼한 뒤 미국에 가서 캠핑카를 타고 다니면서 윤락을 시켰다는데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내가 경기지방경찰청에 이씨가 결혼 전에 내게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편지를 쓴 것들을 제출했다. 캠핑카는 처가 식구들과 여행하기 위해 구매한 것이다.
- 예전에 본 사건이 무혐의 처분이 나온 것과 관련, 경찰 고위간부와의 뒷거래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높은 사람을 알 만한 능력도 없고 그런 형편도 안 된다. 나는 지금 음식 배달일을 하면서 2년 반 동안 원룸에서 살고 있다.
- 본인이 이씨에게 수면제, 마취제와 같은 마약을 먹인 뒤 성폭행을 했고 다른 사람들을 집안에 불러들여 계속해서 성폭행을 지시했다던데.
: 그런 일이 없다. 서울중앙지방경찰청에서 수사받을 때 나의 피를 뽑았는데 마약 성분이 없다고 나왔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런 게 없다. 참고로 수사기관에 우리 아이들과 여행하고 캠핑하는 등 (모습이 담긴) 동영상, 사진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수사기관의 판단도 나온 상태다. 아이들이 나에게 (감시) 당하는 상황에서 이런(웃는) 표정이 나오겠나.
- 아내와 아이들을 24시간 감시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 아니다. 당시 내가 돈 60만원 더 벌려고 야간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럼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때 이씨가 돈이 없다고 해서 내가 2012년 9월인가, 10월부터 2013년 1월경까지 편의점 야간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다면 왜 내가 그때는 감시를 안 했겠나. 말이 안 된다.
- 아이들에게 성폭행을 비롯해 원치 않은 자위, 도둑질 등을 시켰다는데.
: 사실이 아니다. 예전에 큰아이가 포경수술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것도 부끄러워서 말을 안 했기에 (서로 미루다가) 아내가 나보고 얘기하라고 한 적은 있다.
-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거나 아내에게 구타, 협박 등을 했다던데.
: 절대 아니다.
- 마약을 공급받아 아내, 아이들을 비롯해 성관계를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마약을 줬다고 하는데.
: 전혀 사실이 아니다.
- 경찰 수사과정에서 아이들 학교 화장실에서도 성폭행을 했다는 영상이 발견됐다는 얘기가 있다.
: 아니다. 외부인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돼 있다.
- 이 사안과 관련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는.
: (내게) 어떤 문제가 있거나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대응하면 이씨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이를 이용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잠깐 (대응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러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도 고소장을 접수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이씨의 일방적인 얘기다.
아내 “남편, 내게 약 먹이고 윤락 강요… 20년간 맞고 살아”
목사 남편 “재산 노린 허위 사실…고소할 것”
검찰 수사 중… 누리꾼들 진실 규명 촉구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최근 한 교회의 A목사가 자기 아들과 아내를 성폭행했다는 일명 ‘세모자 성폭행’ 사건으로 여론이 떠들썩하다. 더불어 이번 사건의 진실 여부도 뜨겁게 쟁점이 되고 있다.
앞서 지난해 11월경, 세모자는 ‘A목사 부자 성범죄 의혹 철저 수사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었다. 당시 이들은 A목사의 엽기적이면서도 잔혹한 성폭행 등을 폭로했다. 더불어 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호소하기도 했다. 반면 경찰은 증거 불충분이라는 이유로 ‘무혐의’ 송치했다.
하지만 세모자는 “우리의 피해와 주장은 사실”이라며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등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을 하고 있다. 또 세모자는 최근 동영상 사이트에 선글라스와 모자를 쓴 채 자신들의 억울함을 주장했고 영어로 피해 내용을 진술한 영상도 촬영해 미국 CNN 방송에도 제보했다. 비난 여론과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최근 검찰은 수사에 착수한 상태다.
현재 이씨는 남편인 A목사로부터 결혼생활 20년간 지속해서 약물투여, 윤락행위 강요, 폭행과 협박 등을 당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두 아들 역시 A목사에게 집단 성폭행을 비롯해 약물투여, 폭행 등을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다.
<투데이신문>은 세모자 성폭행 사건의 전말을 파헤치고자 지난 2일, 한 카페에서 A목사의 아내 이모씨(44)와 허모(18)군, 허모(14)군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초 이씨를 단독으로 만나려고 했으나 그녀는 아이들과 함께 나와 인터뷰에 임했다.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도 아이들은 자신의 피해를 일관되게 호소했으며 참담했던 과거 피해를 쏟아냈다. 이씨 역시 힘겨운 모습으로 말을 이어갔다.
세모자는 남편이자 아버지인 A목사의 온갖 행각을 폭로했다. 그중 차마 기사에 담아낼 수 없는 내용도 많았다.
하지만 A목사의 입장은 이들과 달랐다. 이혼소송에서 유리하기 위해 이씨가 아이들을 이용하고 있다며 반박하고 있다. 한편, <본지>는 A목사의 아버지가 소속된 교회 측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입장을 들을 수 없었다.
과연 A목사 가족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모자와 A목사의 인터뷰를 통해 본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
- 처음 남편을 만났던 때를 회상한다면.
이씨: 1989 년 겨울 무렵,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서울 강동구 G동에 이사하면서 친구의 권유로 S교회를 나가게 됐다. 종교가 없었던 나는 친구를 따라 주일마다 그 교회에 나갔다. 그 교회에는 남편의 아버지인 B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교회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는데 당시 그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 러던 중 1991년, B목사의 ‘여신도 간음사건’이 터졌는데 남편도 그 사건에 연루돼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남편은 해당 사건을 고소한 상대방 측의 집 근처에 숨어있다가 폭행해 구치소에서 6개월간 살았다. 그리고 감옥에서 나온 그는 미국으로 도피유학을 떠났다.
남 편과의 교제는 1992년경에 시작됐다. 당시 남편은 미국과 한국을 오갔다. 어느 날 그는 나와 친구에게 저녁 식사를 하자고 했다. 식사 후 친구는 먼저 집에 들어갔고 나는 그의 차에 있었는데 차 안에서 그런 일(성폭행)이 있었다. 처음 관계를 맺은 것이 공교롭게 임신이 됐다. 당시 22살이었던 나는 남자친구도 없었고 세상에 대해 잘 몰랐다. 나는 저녁 9시 이후에 집 밖을 나가본 적도 없었다. 임신했다는 것에 너무 놀란 나는 미국에 있던 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자신의 셋째 누나를 찾아가라고 했고 셋째 누나를 만나 낙태를 하게 됐다. 그리고 한 번 더 그를 만났는데 이후 또 한 번 임신을 했지만 계류유산됐다.
그 때까지만 해도 성폭행, 낙태, 계류유산에 대해 친정 식구들은 모르는 상태였다. 식구들에게 도저히 말을 못하겠더라. 어쨌든 나는 이미 한번 몸을 버렸다고 생각해 온갖 걱정을 했다.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나면 ‘처녀가 아닌 것’이 들통 날까 봐 두려웠다. 그리고 나는 ‘순결을 잃었으니 이 사람과 결혼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를 계속 만나기로 마음먹었다.
- 결혼 전, 남편은 어떤 사람이었나.
이씨: 남편은 고등학생 때부터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여자를 만났다. 그리고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아예 술집을 차려서 보도방을 했다. 약을 타서 강간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랬다. 남편은 나를 만나기 전부터 그렇게 살았다. 결혼한 후에서야 이런 사실을 알게 됐다.
- 그와 결혼하게 된 과정은 어땠나.
이씨: 그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와 잠시 머물 때 만나거나 전화를 주고받았다. 물론 자기를 믿으라고 얘기했다. 그런 게 없었다면 나는 그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1995년 8월, 나는 그와 약혼식을 했고 그해 12월에 결혼했다. 나는 그에게서 프러포즈 한번 안 받아봤다. 처음에 친정에서는 남편이 ‘목사’라서 싫다며 결혼을 반대했다. 그런데 그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를 보고 나니까 친정 식구들의 마음이 바뀌었다. 일단 교회 성도가 많았고 교회가 마치 왕궁처럼 잘 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식구들은 ‘네가 이 교회의 사모로 들어가면 우리에게도 뭐가 떨어지지 않겠느냐’며 결혼을 밀어붙였다.
이 런 이유로 나는 약혼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다. 약혼하고 결혼하기 전, 그 과정에서 (친정식구와 남편이) 단체로 성관계를 맺기도 했다. 친정엄마와 언니는 돈도 좋아하고 (성)관계를 밝혔기 때문에 그들은 남편을 자신들의 ‘새로운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친정식구들은 남편이 집에 오면 잘 대해줬다.
이 러한 비정상적인 관계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지만 남편은 내게 ‘알겠다, 잘못했다’고 빌었다. 그리고 1996년 1월, 나는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가자마자 그는 나를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의 구타와 성폭행은 결혼생활 20년간 이어졌다. 아울러 윤락도 시작됐다. (성관계를 하기) 싫다고 하면 맞았다. 그는 말을 참 잘했다. 쇼도 잘하고, 울고불고도 잘했다. 그는 ‘어차피 너는 내 아내고 정말 사랑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나에게 윤락을 요구했다.
-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의 결혼생활은 어땠나.
이씨: 그 는 미국에서도 나를 내세워 남자들과 성관계를 시켰다. 그는 차를 1년에 한 번씩 바꿨는데 매번 현금으로 고급 차를 샀다. 아버지한테 1~2억씩 받았고 윤락을 하면서 버는 것도 있었다. 계좌를 통해서는 돈을 받는 게 한계가 있으니 사람을 통해 돈을 받곤 했다.
나 중에는 캠핑카도 구매했다. 이유는 그곳에서 나를 윤락시키기 위해서였다. 야영장 같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캠핑카로 데려와 성관계를 하게 했다. 미국 전국 일주를 하다시피해서 윤락을 한 적도 있다. 성관계는 나만 시킬 때도 있었고 남편 자신이 할 때도 있었다. 그런데 나를 더 많이 시켰다. 그는 당시 나에게 최음제를 먹여서 성욕이 생기게끔 했다. 그걸 먹으면 자신의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도 모른다. 기억은 나는데 당시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 그럼 한국에는 언제 돌아온 것인가.
이씨: 나와 남편은 1996년부터 2005년까지 미국에 살았다. 2006년쯤 한국에 돌아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
- 남편의 가혹 행위 수준은 어느 정도였나.
이씨: 남편은 아이들이 5살 때부터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두 아이에게 약을 먹이고 (성폭행, 자위 등) 그 짓을 시켰다. 그런데 정작 남편은 약을 먹지 않고 아이들을 성희롱·성폭행했다.
둘째 아들(이하 둘째): 우리는 맞는 게 무서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가, 그때 내 몸무게는 29kg이었다. 당시 나는 많이 말랐을 때였는데 발로 가슴을 맞기도 했다.
이씨: 남편은 아이들을 쫄쫄 굶긴 다음에 “손님 오니까 잘해라”라며 먹을 것을 줬다. 그러면 첫째 아이와 둘째 아이는 엄청나게 맛있게 먹었다. 아이들에게 갈증을 느끼게 한 다음 사이다를 딱 하나 사주기도 했다.
둘째: 아 빠는 음식을 갖고 조건을 내걸었다. 또 아빠는 우리에게 “오늘 누구 오니까 잘해라”라고 하면서 자위 방법, 성관계 방법 등을 가르쳤다. 5살 때부터 친구들이랑 선생님이 있었는데 (집에서 배운 대로) 그 앞에서 자위행위를 했다. 그때는 그게 부끄러운 것인 줄 몰랐다. 아빠는 항상 “아무 곳에서나 (성기를) 내놓고 이렇게(자위) 해”라고 말하곤 했다.
- 남편이 다른 사람들을 한 장소에 두고 ‘집단 성관계’를 시켰다고 하던데.
이씨: 한번 (마약과 성관계에) 중독이 되면 (이 그룹에서) 나가라고 해도 못 나간다. 이미 그 쾌락의 끝을 알고 중독됐기 때문이다. 그와 관련된 섹스촌이 전국에 퍼져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첫째 아들(이하 첫째): 그 사람(아빠)은 우리를 팔았다. 아빠는 다른 사람을 시켜서 우리를 성폭행하게 했다. 성폭행이 다 끝나면 그 사람들은 아빠한테 돈을 줬다.
둘째: 아 빠는 우리가 (다른 사람과) 같이 성관계를 해야 자신이 안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많은 사람과 다 같이 성관계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약 기운이 빠져나간 뒤 정신을 차리면서 “내가 왜 그랬지”라고 말했다. 이후 아빠는 사람들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며 “네가 우리 아이들을 (성폭행)했다”라고 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받아서 해결하든지 입막음을 시켰다.
- 아이들에게 어떤 행위까지 시켰는지 말해줄 수 있겠나.
이씨: 그 는 “하나님이 주신 몸이니까 써먹어야 한다. 섹스를 안 하는 사람들이 미친 것이다. 아담과 하와도 처음에는 벗고 있었는데 옷으로 가려서 쫓겨난 것이다. 벗고 살아야 천국이다”라고 말했다. 아이들에게 도둑질도 시켰다. 나는 아이들이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괴로움을 느꼈다. 남편이 위장이혼을 하자고 했기에 신고를 했지, 아니었으면 그냥 아이들하고 죽었을 것이다. 물론, 도망칠 궁리는 했었다. 이 소굴에서 나가야 한다고 늘 생각은 했다. 그런데 친정도 다 한 패였다. 친언니와 엄마는 남편에게 “쟤를 좀 때려. 저러다가 마음 변해”라고 말하곤 했다.
- A씨로부터 24시간 동안 감시도 당했다고 하던데.
첫째: 그렇다. 우리는 24시간 하루 종일 감시를 당했다.
이씨: 남편은 몰래카메라를 설치했지만 불안한 나머지 아이들한테 엄마가 뭐 하는지 감시하라고 하며 외출하곤 했다.
둘째: 우 리는 학교에 다녔지만 자유가 없었다. 아빠는 우리를 학교에 차로 데려다주고 수업이 마치면 곧장 집으로 달려가게 했다. 우리는 걸으면 안 되고 뛰어가야 했다. 나는 학교에 가면 늘 잠을 잤다. 우리 형도 학교에 가면 항상 멍해있거나 잠을 잤다. 집에 가면 항상 (성폭력 등에) 시달리고 약을 먹었으니까.
이씨: 아이들 학교에서도 집에 계속 전화를 했다. 학교에서는 아이가 이상하다면서 심리치료를 받게 했고 첫째 아이는 2010년부터 정신과에 다녔다. 거기에 대한 진단서도 있다.
-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자유가 없었나.
둘째: 갖 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모두 다 아빠의 마음대로였다. 우리는 친구 집도 못 갔다. 우리 인생인데 리모컨으로 조종하듯 자신의 마음대로 우리를 사용했다. 우리는 노예였고 장난감이었다. 아빠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 했다. 나는 사실 아빠의 후계자였다. 엄마를 감시하라고 하면 감시했고 아빠가 시키는 대로 다 했기 때문이다. 아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를 때리고 소리 질렀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말을 들어야 했다.
- 세 사람 모두 잦은 성폭행으로 몸과 마음이 아팠을 것 같다.
첫째: 아빠는 우리에게 (성폭행이 끝나고 나면) “오늘 진짜 잘했다. 다음에는 더 잘해”라고 말했다. 아파도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병원에 가면 아빠의 범행이 들키니까 못 가게 했다.
둘째: 우리한테는 지옥이었지만 자기(아빠)한테는 천국이었을 것이다. 아빠는 우리를 가족보다 ‘돈’이라고 생각했다.
이씨: 아 이들이 어릴 때부터 약에 중독이 돼서 지능도 떨어지고 집중력도 떨어졌다. 예민하고 성적인 것을 밝히니까 아이들도 하루 종일 그 생각만 하게 됐었다. 당시 나와 아이들은 사리 분별을 못 했다. 집에서도 성폭행에 노출돼 살았기에 모든 세상 사람들이 그러고 산 줄 알았다. 우리 큰아이의 경우는 아빠한테 당했던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현재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고 있다. 아이들이 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웠어야 하는데 강요해서 끌고 다녔기 때문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들의 몸이 반응하곤 했다.
나 역시 20년간 수면제 등을 먹으며 살아서 지금도 머리가 아플 때가 많다. 지금은 거의 제정신으로 산다. 예전에는 글 쓰는 것조차 몰랐다. 기본적인 생활도 못했고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였다. 그렇게 사람을 바보로 만든 것이다. 아이들 역시 옳고 그름을 알고 세상을 배우고 자유도 알고 접하고 우리가 잘못 살았다는 걸 알았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먼저 아빠와 싸우자고 말했고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 두 아이가 영어를 유창하게 쓴다. 영어는 어떤 계기로 배우게 됐나.
첫째: 아빠는 자신의 (윤락) 사업을 잘 되게 하기 위해 우리에게 영어를 가르쳤다.
둘째: 또 아빠는 우리가 한국 사람과 소통이 안 되게 하려고 한국말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만약 한국말을 하면 사람들이랑 대화하면서 아빠한테 성폭행 당했다고 말할까봐.
이씨: 반대로 남편은 나에게 영어를 안 가르쳐줬다. 그리고 혹시 나와 아이들이 무슨 일을 꾸밀까봐 30분도 같이 못 있게 했다. 그는 항상 우리를 자기 옆에 앉게 하고 주시했기 때문에 우리 세모자는 붙어있을 수 없었다.
- 남편이 위장이혼을 요구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씨: 지 난해 남편은 나에게 위장이혼을 하자고 했으며 성폭행에 가담한 10명을 고소하라고 시켰다. 그러면 자신이 뒤에서 (그들에게) 돈을 뜯겠다는 것이다. 또 마지막에 일이 잘 안 되면 자신을 고소하라고 했다. 근데 내가 자꾸 도망을 다니니까 남편이 화가 났다. 우리가 원룸에 숨어있었는데 그는 나와 아이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오기도 했다. 나 혼자 있을 때에도 오고, 아이들만 있을 때에도 왔다. 그리고는 CCTV를 설치해놓고 나갔다. 이후 남편은 나와 아이들에게 억지로 성관계를 시켰고 그걸 찍어서 사람들한테는 ‘엄마가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서 성폭행을 한다’고 소문을 내고 다녔다.
그 동영상으로 CD를 만들어 사람들한테 팔았다. ‘이씨는 나쁜 사람이다. 믿지 마라’고 했다. (이혼을 하고서도) 다른 집에 가서 남자들이나 마을 사람들을 불러서 관계를 맺게 했다. 집을 빌린 다음에 그곳에서 성관계를 시킨 뒤, 그는 우리에게 집을 제공한 사람한테 뒤집어씌우라고 내게 말했다.
- 그 후 생활은 어땠나.
이씨: 아 이들을 필리핀에 보낸 뒤 나는 더욱 끌려다녔다. 원래 남편을 신고할 마음은 없었다. 아이들이 몇백 명한테 (성폭행에) 놀아나느니 공부시키고 필리핀으로 보낼 수만 있다면…. 그래서 아이들을 필리핀에 보낸 것인데 나중에는 뭐만 있으면 필리핀에 있는 아이들을 협박했다.
- 집에서 도망치듯 나왔을 당시, 돈이 없었을 텐데 금전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나.
이씨: 집에서 나오자마자 정부에 범죄피해자센터를 통해 긴급자원을 신청했고 그 돈으로 3개월간 생활했다. 지금은 어떻게 해서든 생활하고 있고 식당 같은 곳에서 일용직 일을 하며 지낸다. 우리는 겁 없는 사람이 아니라 겁이 많은 사람들이다. 내가 20년간 집에서 나오지 못하고 산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사실 나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아이들이 나를 살렸다. 아이들만 살리면 나는 죽어도 상관이 없다. 정말 죽어도 여한이 없다. 우리는 저기 높은 사람들, 무리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를 내리고 댓글을 내리는 건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 혼자 싸우고 있으며 어떤 단체의 도움도 받지 않고 있다.
남 편이 정말 결백을 주장한다면 삼자대면하자고 말하고 싶다. 카메라를 앞에 두고 만나자는 것이다. 나를 미친 여자라고 취급할까봐 2007년에 아이들을 데리고 몰래 나가서 정신감정 받은 것도 있다. 또 해바라기센터를 통해 심리 상담을 받은 것도 있다. 첫째 아이의 C대학병원 정신과 진단 소견서를 보면 ‘상기 환자는 어린 시절부터 장기간 지속된 child sexual trauma(아동의 성적인 정신적 외상)를 주소로 내원하신 분으로 입원 후에도 악몽, 회피, 간헐적인 분노 표출, 신변 안전에 대한 끊임없는 불안과 강박 등의 증상이 중증도 이상으로 지속돼 약물치료 및 면담치료를 진행했다’고 나와있다. 이것은 내가 꾸민 게 절대 아니라 정식으로 받은 것이다.
남편은 나와 아이들을 한번 데리고 나간 다음 이를 사진으로 남겼다. 그리고 사람들한테 보여주며 ‘우리는 행복한 가정’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매일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나가니까 당연히 좋았다.
- 남편 외에 다른 사람들도 고소했다고 하던데.
이씨: 한 두 사람은 생각도 안 난다. 꾸준하게 7년에서 10년가량 우리와 관계 맺은 사람들, 주로 10년 넘은 사람들을 고소했다. 그중에는 자신의 자식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다. 남편은 우리 세모자를 자신의 장사 ‘밑천’이라고 표현했다. 우리 세계에서는 이것(몸을 대주는 사람)을 ‘모델’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사람들에게 “모델을 사서 (윤락을) 하면 모델료를 줘야 하지 않나. 우리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하고 다녔다. 그는 우리를 때리고 세뇌시키고 성폭행을 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조종했다.
- 현재 피의자들은 세모자의 주장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나.
이씨: 현재 우리와 성관계를 한 피의자들은 우리를 모른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들은 그 사람들의 신체적 특징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상대방 쪽에서는 아예 부인하고 있다.
둘째: 경 찰이 나와 형에게 어떤 사람들의 사진을 10장 정도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형이랑 내가 그중에서 우리에게 성폭행했던 사람들을 가리켰다. 이후 우리를 성폭행했던 한 여자와 대질심문을 하는데 그 여자가 막 비웃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 형이 화가 나서 뭐라고 했더니 여자는 “대질을 못하겠다”며 그냥 일어서서 나가버렸다. 우리는 그 여자의 가슴에 뭐가 있고 하지정맥이 있는 것 등을 이야기했다. 우리가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 이번에 경찰이 재조사에 착수했는데.
둘째: 우 리는 자유를 원한다. 우리가 자유를 가지려면 이 사건이 끝나야 한다. 이 사건이 끝나려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많아야 하는데…. 경찰은 오히려 죄를 지은 사람을 피해자로 생각하고 피해를 입은 사람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리고 나는 어리기 때문에 해바라기센터라는 곳에서 조사를 받았어야 했지만 우리는 성폭력수사대에서 조사를 받았다. 어두운 방, 무서운 분위기 속에서 조사에 임했다. 내가 10년 동안 성폭행을 당하고 협박을 당했는데, 그걸 털어놓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 않나. 그런데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면 형사는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했다. 어린 나를 죄인 취급하는 것 같아 겁을 먹었다.
이씨: 엄마인 나는 아이가 조사받을 때 들어가지 못 했다. 또 아이가 어떻게 조사받았는지 조사 당시의 동영상 테이프를 보여달라고 했지만 경찰은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 수사과정에서 성행위 관련 동영상이 발견됐다는데.
둘째: 경 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동영상을 발견했다고 들었다. 그 영상은 아빠와 나, 형의 친구 이렇게 다 같이 학교 화장실에서 성관계를 하는 것이었다. 비디오 자체를 보여줬는데 빨간 글씨로 뭐가 쓰여있어서 보려고 하니 형사는 “이름은 보지말라”고 했다.
이씨: 결 국 경찰에서는 이 사건을 무혐의 처리해 종결시켰다. 이후 경기지방경찰청에서도 무혐의가 됐는데 이는 당시 친정 식구들이 증인으로 들어가 “(이씨가) 정신병이 있다”고 해서 무혐의 처리가 된 것이다. 내가 고소한 사건은 검찰로 올라가야 한다고 본다.
- 지난해 11월경, ‘A씨 부자 성범죄 의혹 철저 수사 촉구를 위한 기자회견’을 연 적이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열기로 결심한 계기는 무엇인가.
이씨: 경찰이 압수수색을 했는데 마약이 없다고 했다. 그때 비디오를 바로 찾아야 했는데 거의 한 달 반 동안 손을 놓고 있었다. 그래서 수사를 촉구하기 위해 기자회견을 한 것이다.
- 남편의 잔혹한 성범죄를 세상에 밝히기로 결심한 이유가 있다면.
이씨: 원 래 우리는 시끄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성폭행을 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충격을 주기 싫어서 안 한 건데, 남편이 아이들을 데리고 간다고 해서 (이 사건을 알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아이들이 아빠에게 가면 평생을 끌려다녀야 한다. 아이들이 이런 아빠를 만나면 뭘 하겠나. 나는 아이들이 변하고 망가지는 게 보기가 싫었다. 무엇보다 아이들도 더는 아빠한테 가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이들이 다 폭로하자고 얘기한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들한테 자유를 달라”, “아빠한테 가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첫째: 아 빠한테 당한 게 너무 심했고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서 죽고 싶고 포기하고 싶었다. 엄마랑 동생한테 많이 미안하다. 내가 아무것도 못 했으니까…. 그때는 내가 힘이 없었다. 엄마가 성폭행 당하는 것을 보면서 (말리지 못한 것에 대해) 나 자신한테 실망했고 화가 많이 났다.
이씨: 이 사건이 낱낱이 밝혀졌으면 좋겠다. 우리 셋만 피해를 본 건 아니다. 하물며 경찰의 자녀라고 안 당한다는 법 없다. 눈앞에 와있을 때는 그것은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빨리 밝혀서 제발 이런 범죄가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길 바란다.
-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씨가 ‘돈 때문에 없는 사실을 지어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또한 ‘기독교 죽이기’가 아니냐는 의혹도 있는데 이에 대한 입장이 듣고 싶다.
이씨: 기 자님 말씀대로 누군가는 내가 ‘교회 돈을 바라고 집을 나온 게 아니냐’고 한다. 내가 정말 돈을 바라고 이러는 것이라면 이렇게 힘들게 안 했을 것이다. 사람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남편의 아버지인 B목사에게 가서 바로 돈을 달라고 하지 않았겠나. ‘기독교’를 죽이려는 의도도 절대 아니다. 나는 기독교의 ‘정통교회’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없이 몸뚱어리 하나로 집을 나왔지만 돈이 궁한 게 절대 아니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아이들의 ‘자유’다.
- 앞으로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씨: 우리는 그냥 밥 먹고 평범하게 학교 다니면서 살길 바란다.
첫째: 아 빠, 할아버지, 우리를 성폭행했던 사람들이 우리가 느꼈던 고통을 두 배, 열 배는 더 느꼈으면 한다. 나와 동생 그리고 엄마는 할아버지랑 아빠한테 맞으면서 살았다. 그에 대한 죗값을 받길 바란다. 앞으로 나는 친구들도 사귀고 평범한 인생을 살고 싶다.
둘째: 무엇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자유를 갖고 싶다. 우리를 성폭행했던 사람들이 마땅한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가 아빠랑 안 닮았으면 좋겠다. 아빠는 내가 어릴 때부터 항상 나쁜 것만 가르쳐줬기 때문에 나는 ‘나중에 습관이 되면 어떻게 하지?’하고 걱정한 적이 있다. 나에게 나쁜 것이 남아있다면 빨리 고치고 싶고 착한 아이로, 평범한 사람이 되고 싶다. 또 공부 열심히 하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나도 내 가족이 생겨서 내가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꼭 좋은 아빠가 될 것이다. 이 일이 해결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생기고 이 사건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빨리 자유를 얻었으면 좋겠다.
[A목사 인터뷰] <본지>는 3일, A목사와의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는 세모자 성폭행‧가혹 행위 논란에 대해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하고 있다. 아래는 A 목사와의 일문일답이다.
- 이씨가 본인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해 어쩔 수 없이 결혼했고 지금까지 성폭행, 구타, 약물 투여 등을 당했다는데 사실인가.
: 경찰 조사에서 이와 관련해 다 무혐의 처리가 됐다. 이씨가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돈 때문에 시작된 사건이다. 2014년 4월쯤, 등기부 등본을 떼어본 뒤 이씨가 돈을 편취한 것을 알게 됐다. 그 이후부터 돈 얘기가 나왔고 내가 2심에 변호사를 선임해서 재산분할 들어가니까 이후 이씨가 성폭행, 성추행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 지난 1991년, 본인의 아버지가 여신도 성폭행 사건에 연루됐을 당시 본인도 이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하던데.
: 아니다. 그건 무혐의가 나온 사안이다.
- 당시 이씨와 결혼한 뒤 미국에 가서 캠핑카를 타고 다니면서 윤락을 시켰다는데 사실인가.
: 사실이 아니다. 내가 경기지방경찰청에 이씨가 결혼 전에 내게 사랑한다고 결혼하자고 편지를 쓴 것들을 제출했다. 캠핑카는 처가 식구들과 여행하기 위해 구매한 것이다.
- 예전에 본 사건이 무혐의 처분이 나온 것과 관련, 경찰 고위간부와의 뒷거래 의혹도 제기되고 있다.
: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높은 사람을 알 만한 능력도 없고 그런 형편도 안 된다. 나는 지금 음식 배달일을 하면서 2년 반 동안 원룸에서 살고 있다.
- 본인이 이씨에게 수면제, 마취제와 같은 마약을 먹인 뒤 성폭행을 했고 다른 사람들을 집안에 불러들여 계속해서 성폭행을 지시했다던데.
: 그런 일이 없다. 서울중앙지방경찰청에서 수사받을 때 나의 피를 뽑았는데 마약 성분이 없다고 나왔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런 게 없다. 참고로 수사기관에 우리 아이들과 여행하고 캠핑하는 등 (모습이 담긴) 동영상, 사진을 제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수사기관의 판단도 나온 상태다. 아이들이 나에게 (감시) 당하는 상황에서 이런(웃는) 표정이 나오겠나.
- 아내와 아이들을 24시간 감시했다는 얘기도 있는데.
: 아니다. 당시 내가 돈 60만원 더 벌려고 야간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그럼 앞뒤가 안 맞지 않나. 그때 이씨가 돈이 없다고 해서 내가 2012년 9월인가, 10월부터 2013년 1월경까지 편의점 야간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다면 왜 내가 그때는 감시를 안 했겠나. 말이 안 된다.
- 아이들에게 성폭행을 비롯해 원치 않은 자위, 도둑질 등을 시켰다는데.
: 사실이 아니다. 예전에 큰아이가 포경수술해야 할 상황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것도 부끄러워서 말을 안 했기에 (서로 미루다가) 아내가 나보고 얘기하라고 한 적은 있다.
-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거나 아내에게 구타, 협박 등을 했다던데.
: 절대 아니다.
- 마약을 공급받아 아내, 아이들을 비롯해 성관계를 하러 오는 사람들에게 마약을 줬다고 하는데.
: 전혀 사실이 아니다.
- 경찰 수사과정에서 아이들 학교 화장실에서도 성폭행을 했다는 영상이 발견됐다는 얘기가 있다.
: 아니다. 외부인은 학교에 들어가지 못하게 돼 있다.
- 이 사안과 관련해 적극적인 대응을 하지 않는 이유는.
: (내게) 어떤 문제가 있거나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조금이라도 대응하면 이씨가 아이들에게 거짓말을 시키고 이를 이용할 것을 알기 때문에 잠깐 (대응을) 유보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여러 사건이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도 고소장을 접수할 것이다. 조금만 기다려봐라. 이씨의 일방적인 얘기다.